<국제신문> 충무공 구국의 해양정신..판결로, 추모사업으로 실천의 삶 (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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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02 11:21 작성일 조회23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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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지혜 깨달아 나라 구하고
- 지역·계층 하나로 이어준 장군
- 판사 재직 때 틈틈이 자료 수집
- 책 펴내며 그의 정신 확산 앞장
- 학교 개설 ‘작은 이순신’ 육성도
- ‘해양인 열전’에 소개된 인물들
- 바다의 생명력으로 고난 극복
- 그들 모두가 또 하나의 이순신
남해안 지역에 전해오는 ‘설운장군 전설’은 그 줄거리가 비장하다. 태어나자마자 섬과 섬 사이를 뛰어넘을 만큼 힘과 용기가 뛰어난 설운은 장성하여 왜구를 쳐부수는 장군으로 백성을 평안케 했다. 하지만 그가 조정에 해가 될까 두려워한 관군의 계략으로 결국 그는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 왜적과 싸워 연전연승하고도 모함에 빠져 고난을 당했다는 일대기에 민초들의 서럽고 고단한 애환과 영웅에 대한 숭모의 마음, 그리고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 대한 불만이 드러난다. 영락없이 충무공 이순신의 그림자가 얼비치는 전설이다.
기왕에도 김 재판관은 ‘이순신 전도사’로 알려진 터였다.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장으로 재직하던 2002년 쓴 ‘이순신 평전’부터 이순신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서적을 잇달아 펴냈다. 2014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이순신 사업에 뛰어든 그는 뜻이 통하는 ‘동지’들을 모아 서울과 부산, 여수에서 이순신의 자(字)를 딴 여해재단을 설립했다. 내쳐 ‘이순신아카데미 지도자과정’과 ‘이순신학교’를 개설해 ‘작은 이순신’ 배출에 나섰다. 자신은 200회가 넘는 언론과의 인터뷰와 강연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경남 창원에서 김동규와 남상연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김해와 부산에서 자랐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군법무관 복무 중 정훈교육을 위해 고른 이은상의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이순신에게 빠져들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쓸개가 찢기는 듯한’ 심신의 고통과 고뇌에 몸부림치면서도 공의(公義)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삶에 매료되었다. 이후 김 재판관은 판사로 근무하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이순신 유적지를 둘러보고 지인들에게 소개했으며 관련 자료를 모아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난중일기’를 몇 번이고 음미했으며 때로는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 6개월을 고민했다. 언제부턴가 그는 난제에 부닥치면 머릿속에 이순신을 떠올려 그의 지혜와 가르침을 참고하는 습관이 생겼다.
수석부장판사 시절에는 부도 위기에 처한 삼성자동차가 법정관리를 받도록 조정해 근로자들 일터를 지켜냈다. 헌법재판관으로 재임 시에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지 않는 부작위를 ‘위헌(違憲)’이라 판시했다.
■바다 생명력으로 나라를 구한 영웅
남송우 이순신학교 교장은 김 재판관이 사랑과 정성 정의 자력(自力)으로 요약정리한 ‘이순신 정신’을 해양인문학적으로 재해석했다. “바다가 근원적 생명력으로 만물을 살려내듯 이순신은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죽음으로 삶을 견인했다.”
과연 이순신은 바다의 생명력으로 나라를 구했으되, 실제로도 바다에서 터득한 지혜를 활용할 줄 아는 명장이었다. 해전에 나설 때면 해역의 물길과 수군 집결지, 적선의 정박지 등을 치밀하게 파악해 전투를 벌인 전략가였다. 그래서 바다 사정에 밝은 부하들을 존중했으며, 물길에 밝은 어영담이 체직(遞職)이 되어 싸울 수 없게 되었을 때는 ‘해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어영담 없이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란 상소를 올렸다.
또한 수군이 괴멸된 상황에서 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정유년에는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어명에 죽음을 무릅쓴 항의성 장계를 올렸다. ‘바다를 버리곤 나라를 구할 길이 없는데, 어찌 수군을 폐합니까? 신에겐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죽기로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한편 이순신은 지역과 계층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도 탁월했다. 부하들로 하여금 ‘적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소?’라고 뜻을 모으도록 유도했다. 노비라 할지라도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상을 내렸으며 자신의 칼에는 제작자인 대장장이 이름을 새겨넣었다. 왜적들이 해전에서 패퇴할 때는 타고 도망칠 배를 남겨놓아 그들이 상륙하여 백성을 해칠 피해를 줄여주었다.
그처럼 백성을 보살피고 사랑한 이순신의 마음은 계층과 지위를 막론하고 떨쳐나선 의병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종대 재판관은 그런 이순신의 애민정신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공무원은 봉사자라 밝힌 대한민국 헌법 1조, 7조 정신과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영화 ‘명량’에서 ‘충(忠)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란 대사나 와류에 휘말린 대장선을 어민이 구하는 허구에도 무리가 없다고 보았다.
■이순신 정신이 길러낸 ‘작은 이순신’
이순신을 숭모하는 사업은 조선 효종대 이래 다양하고 꾸준하게 전개돼왔다. 정조대에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해 위업을 기록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신채호가 ‘이순신전’ 등을 발간해 그를 ‘민족영웅’으로 추앙했다. 해방 이후에도 총통 등의 유물 찾기와 현충사 성역화, 100m 동상 건립계획에 이어 숱한 영화와 소설이 제작, 발표되었다. 대구가톨릭대에는 서울여해재단의 지원으로 대학원 이순신학과가 설립됐다. 국가가 ‘이순신 정신’을 연구 교육 사업을 수행토록 하자는 ‘이순신재단 설치 및 유지에 관한 법률안’도 국회에 제안되어 있다.
더불어 임진왜란에서의 부산포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부산대첩의 의의를 재조명하자는 움직임도 진행 중이다. 옥포 당포 한산대첩의 여세를 몰아 대승을 거둔 부산대첩의 의의에 대해 김강식 한국해양대 교수는“왜군의 병참기지이자 전진기지였던 부산포를 타격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고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했다. 기왕에도 부산대첩 승전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한 데 이어 그 무대였던 북항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부산대첩기념관과 이순신장군상을 안치하자는 계획도 마련 중이다.
그러다 보니 ‘또 이순신이냐?’고 식상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김종대 재판관은 그들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흥행용 영화, 박제된 동상, 관광팸플릿만으로 이순신을 알게 됐다고 속단하지 말라.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얻은 깨달음을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 말처럼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이순신 정신’ 확산에 주목하게 된다. 오늘날 곳곳에 만연된 위험과 분열, 좌절의 방지와 봉합, 치유에 이순신이 실천한 가치가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올해 영광도서 독서감상문공모에서 김 재판관의 저서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나이다’ 독후감으로 대상을 받은 하진형 씨는 이렇게 썼다. “인생 말년에 나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순신이 겪은 고통은 그 천만 배였다. 그를 만나고 나는 재기할 힘을 얻었다. 농사를 시작하고 대학원에 입학해 삶의 보람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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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이곳 ‘뉴프런티어 해양인열전’ 난에 소개된 인물들도 고난을 극복하고 창의를 실천한 점에서 ‘이순신 정신’을 구현한 사람들이다. 역경을 무릅쓰고 어기찬 삶을 살아낸 깡깡이아지매와 해녀, 창의로 해양을 개척한 방파제 발명가와 해저로봇 전문가, 새로운 분야에서 해양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서핑 선구자와 극지연구 과학자 모두가 그렇다.
그들이 지켜주는 한 우리네 바다는 언제까지든 생명력 넘치는 삶의 터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도움말씀 주신 분 = 김강식 한국해양대 교수, 남송우 부산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장
※ 공동 기획=국제신문, 한국해양수산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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