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부산피디아 WHO] "왜적선 100척 부산 앞바다에 수장 " 김종대 명예이사장(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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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19 18:04 작성일 조회43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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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선 100척 부산 앞바다에 수장 " 김종대 명예이사장 [부산피디아 WHO(後)]
"난중일기라는 이름은 사실 이순신 장군이 붙인 게 아닙니다. 임진일기, 계사일기 등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7년 동안 매년 기록을 남겨왔습니다. 이 일기를 약 200년이나 지난 후 정조 시대 때 묶어 편찬한 게 난중일기입니다. 처음 듣죠? 오늘 아주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될 겁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고, '이순신 알리기'에 매진하는 부산대첩기념사업회 김종대 명예이사장이 말했다.
매년 10월 5일은 '부산시민의 날'이다. 1980년 손재식 시장 시절 제정됐는데, 이날이 되면 부산 곳곳에서 축제와 시민 참여 기념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40년이 넘었지만 이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부산 시민 대다수는 모른다. 힌트는 이순신 장군. 명량해전, 한산도대첩, 그리고 노량해전 등 이순신의 '3대 해전' 못지않게 중요한 전투가 바로 부산 앞바다, 즉 지금의 부산항 일대에서 벌어졌다. 바로 임진년을 종결지은 마지막 해전 부산대첩이다. 부산시민의 날인 10월 5일은 부산대첩의 승리를 자축하고 기억하는 날이다.
그런데 왜 부산 시민들은 부산대첩에 대해 잘 알지 못할까. 왜 부산대첩은 다른 해전과 비교해 잊혔을까. 김종대 명예 이사장을 만나 부산대첩에 관해 자세히 물었다.
'이순신정신'을 지닌 '작은 이순신'의 육성을 목표로 부산대첩기념사업회에서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종대 전 헙법재판소 재판관.
■ 바다에서 시작된 반격
"1592년 5월 부산은 왜적에게 철저히 짓밟힙니다. 16만여 명의 대군단이 우암 앞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쳐들어오죠.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부산진성을 지킨 정발 장군, 동래부사 송상현, 다대포 첨사 윤흥신 그리고 많은 백성과 군인들이 왜적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이후 부산은 7년 동안 왜적의 본진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부산을 통해 무기, 식량 등 전쟁물자가 보급하고 주요 병력을 주둔시켜 '본진'으로 전락시킨다. 파죽지세로 밀고 간 왜적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함락하고 선조는 평양까지 도망친다.
"수도가 점령되는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저항 세력이 전무했다는 거죠. 조선 땅에서, 육지에서 적들과 싸울 세력 자체가 없었다는 겁니다. 뿔뿔이 도망가거나 숨기 바빴습니다. 반격은 바다에서 시작되죠."
임진년의 마지막 무대. 그 중심은 바로 부산항이다.
전라좌수군을 이끄는 이순신은 임진년에 총 4번 출정을 한다. 6월 옥포해전에서는 적선 26척을 침몰시키며 조선군 최초로 승리를 기록한다. 기세를 이어 7월, 2차 출정. 사천·당포·당항포에서 연이어 승전보를 올린다. 그리고 8월 한산도 3차 출정. 거북선을 앞세운 학익진으로 적선 50여 척을 수장시키며 대승을 거두게 된다. 3번의 출정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왜적에게 이순신은 저승사자 그 자체였다. 적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해전 금지령까지 내린다.
"이순신 장군도 조선 수군의 활약에 자신감이 붙은 상황이었습니다. 3번의 출정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이제 남은 건 적은 본진, 즉 부산을 공략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죠. 이순신 장군은 부산을 되찾는다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 정운을 잃고 바다를 얻다
조선 수군 연합 함대의 본진인 여수에서 부산까지는 그때 당시 뱃길로 4일이 넘는 거리였다. 500여 척의 적선과 수만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침략 전진 기지를 공격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게도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의 본진을 소탕한다면, 왜적에서 엄청난 치명타를 줄 수 있었다.
"출정에 앞서 이순신은 해남에 있는 전라우수군을 부르죠. 9월 6일 전라우수군 전라좌수군이 여수 앞바다에 집결합니다. 그리고 약 한 달 동안 함께 기동훈련, 진법훈련에 매진합니다. 출정일 하루 전날까지 맹훈련이 이어지죠. 그리고 29일 이순신 장군은 4차 출정을 나가게 됩니다."
10월 4일 장림포해전을 시작으로 이순신 장군의 부산대첩이 시작된다. 5일 화준구미(몰운대)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구평동)해전, 절영도해전, 초량목(부산세관 근처)해전 등 총 24척의 적선을 격파하며 영도다리가 놓인 지점을 통과해 부산항으로 진격했다.
조선 수군은 부산대첩에서 왜적선 100여 척을 부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앞세워 장사진(일렬)을 펼치며 부산 앞바다로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바다에서 승산이 없었던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해안선 진지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거북선 2척과 판옥선 74척이 주요 병력이었던 조선 수군, 단순히 숫자만 놓고 비교하면 불리하지만, 반복된 패배로 왜적들은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왜적들은 난공불락 거북선을 공격하다 뒤에서 오는 판옥선의 공격을 막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거북선은 더 가까이 침투해 적진을 초토화했다. 치열한 전투는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100여 척의 왜적선을 부산 앞바다에 가라앉힌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희생도 있었다. 바로 이순신의 오른팔 정운이 부산대첩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몰운대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
"이순신 장군이 살아생전 지휘했던 전투,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잃는 노량해전을 제외하고 부하 장수가 죽음을 맞이한 전투는 부산대첩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엄청나게 치열했다는 뜻이죠. 정운은 이순신에게 의미가 남다른 장수였습니다. 정운은 네 차례 출정하는 동안 매번 선두에 서서 큰 공을 세웠고 이순신과 머리를 맞대고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는 사이였습니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정운 장군을 임진왜란 이전 왜적을 막다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에 같이 모시게 해달라고 장계를 올립니다. 이순신 장군은 정운의 장례에 직접 추모하는 글을 지어 바치며 그의 영령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몰운대에 세워진 정운장군 추모비.
■ 바다를 가져온 전투
부산대첩은 그 규모와 치열함에 있어 '이순신의 3대 해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이순신 장군도 부산대첩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부산싸움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척을 격파했다,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두려워서 벌벌 떨게 했다.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번보다 훨씬 크다’고 보고했다.
"이순신 장군 4번의 출정은 모두 중요하죠. 옥포해전은 승리의 씨앗을 뿌렸고, 당항포해전은 잎을 피웠으며 한산해전이 꽃을 피웠다면, 부산대첩 '제해권 장악'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전투입니다. 부산대첩 이후 바다는 조선 수군은 통제하에 있게 되죠. 바다를 되찾은 결정적인 전투가 부산대첩입니다. 왜적에게 그들의 본진이 공격당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겠죠. 왜적들의 활동에 큰 제약이 생긴 것은 당연합니다. 당시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 사령관 하시바 히데카츠가 부산포해전에서 패한 뒤 화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동시에 부산대첩은 왜적의 해상 보급로를 틀어막아, 육군과 수군의 동시진격이라는 왜적들의 '수륙병진' 전략의 한 축을 무너뜨린 전투다. 평양까지 진출했던 왜적은 부산대첩 이후 경상지방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계기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임진왜란은 장기간 대치 국면을 맞게 된다. 부산대첩은 임진년을 승리로 종결지으며 일종의 휴전 상태까지 끌어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북항 앞바다에 잠들어 있는 셈이죠. 임진년을 마무리하고 왜적들로부터 바다를 되찾게 된 전투가 부산대첩입니다. 자랑스러울만 하죠."
북항재개발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의 명칭이 '이순신대로'로 결정되면서, 부산대첩을 알리는 작업이 더 가속화 될 전망이다.
■ 잊혀진 부산대첩
"1980년 부산시민의날을 제정하려 할 때 여러 후보가 경쟁을 벌였습니다. 최종까지 다툼을 벌인 날이 송상현 부사가 순국한 날과 부산대첩 승전일이었죠. 결국 부산대첩 승전일이 부산시민의날로 정해졌습니다. 43년 전에 정해졌는데 왜 지금 부산 시민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할까요.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져 안타깝고 또 후대들 보기에 창피할 따름입니다."
최근 부산항 북항재개발 지역 주요 도로의 명칭이 '이순신대로'로 정해졌다. 부산세관에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잇는 길로 부산대첩의 승전지에 걸맞아 보인다. 더불어 부산의 랜드마크가 될 북항을 관통하는 도로 이름을 ‘이순신대로’로 지음으로써 잊힌 ‘부산시민의 날’의 의미를 살리는 효과도 크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북항 일대에 부산대첩기념관이나 부산대첩기념공원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부산대첩 승전로를 따라 관광코스를 만드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2030엑스포가 북항에 유치된다면, 그야말로 전 세계에 부산과 부산대첩을 알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첫 단추가 끼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대로로 길 이름이 결정되면서 부산대첩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에서 부산대첩을 다시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셈이죠. 우리 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하는 여러 행사들도 위대한, 보석 같은 우리의 과거를 후손들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산대첩이 있어서 부산이 있고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죠."
430여 년 전 부산 북항 앞바다에는 나라를 구한 호국의 역사가 잠자고 있다. 부산대첩 승전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이순신 정신' 즉 왜적의 침입에 당당히 맞서 싸워, 패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원동력을 '부산 시민의 정신'으로 이어받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민, 정의, 선공후사 등 이순신 정신은 우리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는 비결을 담고 있습니다. 부산대첩의 정신은 곧 이순신 정신이고 이는 부산시민의 정신인 셈이죠. 어떤 역경도 극복하고 승리해 나가는 도시가 되자 그런 의미죠. 부산대첩은 부산 시민이라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