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첩기념사업회 [밀물썰물] 재발견 부산대첩 (부산일보 201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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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0-24 10:24 작성일 조회2,45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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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이 평범한 문장만큼 역사를 명쾌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 '끊임없는 대화'는 미래까지 포함시켜 나갈 때 역사 사회 문화 인간을 직조하고 창조하는 동력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내일의 설계와 연결시키는 '대화'는 한마디로 '인간 행위의 핵심이자 모든 것'이랄 수 있다.
그 대화의 한 장면으로 부산포해전이 부산대첩으로 재발견되고 있다. 부산포해전을 이순신의 3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명량·노량대첩 이상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능히 그러하다. 1592년 임진년 음력 9월 1일, 우암동~감만동 앞바다에는 500척의 왜군 배와 병사 1만 8000명이 있었다.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에 조선 함대 166척이 뛰어들어 적의 배 100척을 부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꾼 대승리였다. 1592년 임진년에 이순신은 4차 출전해 10번의 해전을 치렀는데 이순신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서 "4차의 출전에서 부산 싸움보다 더한 전투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같은 해 7월의 한산대첩보다 부산대첩을 더 큰 승리로 꼽은 것이다.
부산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남해 해상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는 무서운 것이었다. 평안·함경도로 치고 올라가던 왜군에게 여차하면 본국으로 튀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실제 이후 왜군은 남해안 연안으로 철수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와서 전쟁을 지휘하려던 계획을 수포로 만들어 저들의 전쟁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의 조선 침략 전략을 전면 수정하게 한 대첩이었던 것이다.
부산대첩은 그간 왜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걸까. 명확히 보지 않아 역사의 주변부에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부산 시민의 날 제정은 부산포해전 승전 날을 기념한 것이었으나 좀 미흡했다. 무엇보다 이름은 중요하다. '부산포해전'이 '부산대첩'으로 재명명된 이유다. 지난 27일 부산 각계 인사들이 참가해 부산대첩기념사업회(이사장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도 창립했다. 부산 역사의 재발견, 재명명은 쉼없이 이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정치·사회·문화·경제적으로 부산의 오늘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부산대첩', '부산 큰 승리'의 진정한 의미일 테다. 문제는 오늘이다.
최학림 논설실장 theos@
원본기사 :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804290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