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이순신 자살說은 완전허구… 마지막 승리 위해 죽음 숨겼을 뿐”
페이지 정보
작성일 18-10-24 10:32 작성일 조회2,276회관련링크
본문
김종대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前 헌법재판관)
군법무관때 이순신전기 감명
40년간 한가지 연구에 빠져
서울·부산·여수 전국 3곳서
이순신정신 강사 250명 양성
부산시민의 날은 부산대첩일
기념사업회 창립해 정신 기려
한국사회 물질 가치에 경도
권력에만 집착 양극화 심화
사랑·정성·정의·자력 갖춘
‘작은 이순신’ 많이 배출돼야
지방선거 출마하는 정치인들
선공후사 정신부터 본받아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충신과 명장의 표상이다. 온갖 악조건에도 초인적인 정성을 쏟아부어 연전연승해 나라와 백성을 지켜내 성자의 반열에 오른 그는 성웅(聖雄)으로 불린다. ‘이순신 정신’을 잘 살리면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시민운동에 나선 사람이 있다. 서울과 부산, 여수에서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교육하는 (사)여해재단 고문을 맡고 있는 김종대(70)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부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33년간 판사 및 부장판사, 지방법원장, 헌법재판관 등을 역임했다. 김 전 재판관이 정의하는 이순신은 자각과 수양으로 인격을 갖춘 완벽한 인간, 모든 공직자의 사표, 가장 성공한 지도자다. 김 전 재판관은 40년간 공부를 통해 집약한 이순신 정신을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의 4가지로 요약했다.
그는 최근 창립된 ‘부산대첩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순신 정신을 되살려 도시의 미래가치를 만들자고 주창하고 있다.
이순신 정신 연구와 알리기에 그렇게 오래 천착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이순신 정신으로 어떻게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느냐도 궁금했다. 그를 두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김 전 재판관은 요즘 한국사회의 병폐와 문제점을 지적하며 운을 뗐다. “우리 사회가 너무 물질적 가치에만 경도돼 있습니다.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함께 살자는 공동체적, 도덕적, 인성적 정신가치가 너무 빈약합니다. 돈과 권력은 한정돼 있는데 여기에만 전력투구를 하다 보니 무한경쟁이 벌어지고 사회 양극화와 충돌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의 목표는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이어야 하는데 권력과 당선, 재선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회 병폐를 치료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불행해집니다. 특히 이렇게 되면 더 큰 문제점은 착하고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이 먼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2014년 4월 발생한 세월호 침몰 참사라고 했다. “세월호참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주, 선장·선원, 해경 등 사건의 3주체 모두가 책임이 있습니다. 선주는 돈만 벌기 위해 과적 등 각종 불법을 저질렀고 선장이 먼저 탈출했습니다. 해경과 정부도 대처가 늦었죠. 철저한 이기주의와 무사안일이 겹쳐서 난 사고입니다. 어린 생명들에 대한 존엄이 있고 한 주체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겁니다.”
―‘이순신 정신’을 배우면 이런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이 병을 치료하는 데 이순신 정신만 한 약재가 없고, 이를 약으로 만든다면 특효약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약의 성분은 공동체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정성, 정의와 자력 정신입니다. 이 4가지 가치를 약으로 복용해 ‘작은 이순신’들이 많이 배출된다면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정성’은 전심전력을 다하면 귀신도 알아보고 하늘이 돕는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나기 1년 2개월 전부터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쟁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을 완성했습니다.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예견이 가능하고 기적도 일어납니다. 이순신 장군은 최선을 다하되 일이 끝나면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신(臣)이 헤아릴 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성은 과정일 뿐 사랑이라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는 왜군의 침략으로 온갖 핍박을 받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마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정성이 허망하기 마련입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소통’을 강조하는데 소통을 기술로 보면 안 됩니다. 소통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시도만 하면 됩니다. 방법과 기술은 사랑이 있으면 다 저절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결과에만 연연해 계산하기 시작하면 온갖 사심이 생겨납니다.”
―이런 정신을 전파하고 ‘작은 이순신’들을 양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서울과 부산대첩의 고향 부산,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전남 여수 등 3곳을 기점으로 이순신 정신 강사 양성을 위한 최고 지도자 과정을 개설하고 공감하는 분들과 뜻을 모았습니다. 부산과 서울은 지난 2014년 6월부터 한 달에 1회 3시간씩 10개월 과정으로 운영했습니다. 여수는 1년 뒤에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는 통영 한산도, 아산 현충사 등을 답사하는 것도 포함돼 있습니다. 3곳의 지도자 과정에서 모두 250여 명이 배출됐습니다. 대학 총장, 기업 회장, 법원장, 공무원, 주부 등 직업도 다양합니다. 각 지역마다 여건이 되는 10여 명이 다시 강사로 나서 이순신 학교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의 예를 들면 정철원 협성종합건업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부산 여해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순신학교를 열어 남송우(부경대) 교수가 교장으로 있으면서 지도하고 있습니다.”
―공직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공직자는 이순신 장군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공무원 등은 국민을 위해 봉사를 하는 책임자나 실무자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각종 허가는 담당 공무원이 권한이 있어 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이 하는 것을 도와줄 뿐 끗발을 부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은 당시 군주국가인 조선에서 백성을 주인으로 삼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백성의 행복을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피란민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서 직접 손을 잡고 위로했습니다. 우리나라 공직자 체계는 너무 삼각형 구도입니다. 대법원만 하더라도 배당되는 사건이 너무 많아 재판이 수년 이상 연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법관을 수십 명으로 늘리는 것은 안 하려고 합니다. 권위가 떨어지고 예우를 받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등 선진국과 너무 다릅니다. 신속한 재판을 바라는 국민의 행복만을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언제부터 연구했습니까.
“1975년 공군 법무관으로 근무할 때부터이니 40여 년이 지날 정도로 오래됐습니다. 군인을 상대로 정훈교육교재를 찾다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이순신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조 때 선양사업으로 발행한 관련 서책 20여 권 등도 어렵게 구해 공부했습니다. 난중일기와 동시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언급한 각종 ‘행장’들도 직접 참고했습니다. 직접 책을 써보기로 마음먹고 2002년 부산지법 동부지원장을 할 때 ‘이순신 평전’을 썼습니다. 다시 2003년 서울에서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두 번째 책을 발간해 1만 부가량이 팔리는 등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정사에 근거해 이순신 장군 내면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2007년 ‘여해 이순신’에 이어 헌법재판관을 마칠 즈음인 2012년에 네 번째 책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쳤나이다’를 출판했습니다. 처음 쓴 책들의 내용이 미흡해 계속 보충하고 고쳤는데 마지막 책도 새로운 사료가 밝혀질 때마다 20번이나 부분, 부분을 고쳐 쓰는 바람에 출판사가 아주 싫어했습니다(웃음).”
―책을 써온 기간만 10년인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이순신 장군 평전 출판기념회 때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축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어록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말아도 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 승지 최유해가 쓴 행장에 나오는 말로 이 책에 인용했습니다. 이순신의 ‘자력’과 ‘정의’ 정신이 얼마나 투철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승진에 연연하지 않아 같은 집안사람인 이조판서 이율곡의 사사로운 만남을 거부하고, 세 차례 파직과 두 차례 백의종군에도 남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일부 소설과 드라마 등에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의 ‘자살설’을 다뤘습니다. 그러나 이는 재미를 위한 허구입니다. 노량해전 전에 당시 반대파의 조정 대신이 ‘전쟁이 끝나도 살아 있으면 역적으로 몰린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설도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할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3분의 1 정도가 남아 가장 치열할 때였습니다. 마지막 승리를 위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독려했는데 자살을 할 리가 없습니다.”
“무능한 왕인 선조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차라리 체포되지 말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희망을 피력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을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3년 8개월 동안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다가 왜군의 음모에 휘말린 내통 혐의로 체포될 때 몇 명 밖에 거느리지 않은 의금부도사에게 순순히 응했습니다. 당시 막강한 왜군조차 격파한 이순신 장군이 반항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과 군사들이 울부짖으며 반기를 들 때 이를 제압한 것은 이순신 장군 본인이었습니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를 창립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부산과 엄청난 인연이 있습니다. 장군의 3대 대첩인 한산·명량·노량대첩이 널리 알려졌지만 부산대첩도 그에 못지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선 130여 척을 깨뜨린 전과로 보면 오히려 한산대첩을 능가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부산대첩의 승전고를 울린 1592년 9월 1일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 5일입니다. 부산은 1980년부터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해 기념해오고 있습니다.”
김 전 헌법재판관은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21세기 시민 정신과 연결하면 문화적으로 품격 있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며 “지난 4월 27일 ‘부산대첩기념사업회’를 창립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회 창립이 입소문을 타면서 2억 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고, 이 중 1만 원 이하 순수 시민 성금으로 참여한 시민이 500여 명에 달한다.
그는 “부산대첩 현장인 부산항 북항에 부산대첩기념관을 건립해 이순신 정신의 교육장으로 만들었으면 한다”며 “당시 조선 수군의 진공로인 가덕도∼영도∼북항을 잇는 부산대첩 탐방로 순례 등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관련 학술세미나 및 심포지엄, 이순신 아카데미·장학사업, 청년 해양 프런티어 사업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부산 인구가 350만 명인데 이순신 정신을 알고 실천하는 1만 명 정도의 시민이 있으면 시민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 = 김기현 기자 ant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