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산시민의 날과 이순신 장군 /서정의(국제신문 20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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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7 13:46 작성일 조회1,40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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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첩기념사업회 고문 서정의
1592년 8월 24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왜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출항, 경남 통영과 거제도를 거쳐 9월 1일 마침내 왜군 수군 본진이 있던 부산포에 당도한다. 당시 부산포에는 왜군 8000여 명과 전선 430여 척이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 전투에서 함포사격으로 왜군 전선 128척을 격침시키고 3800여 명을 살상하는 엄청난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도 ‘부산대첩’은 그동안 한산도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과 비교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부산에서조차 그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는 데 소홀했다.
10월 5일 ‘부산시민의 날’이 ‘부산대첩’ 승전일인 1592년 음력 9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라는 것을 아는 부산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부산대첩’은 임진왜란 전세를 뒤집는 쾌거였다. 우선, 북진을 거듭하던 왜군의 전략을 뒤흔든 계기가 됐다. 왜군 육군은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까지 함락시켰으나 ‘부산대첩’ 이후 군수물자, 식량 등 보급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전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의 일방적 패퇴에서 한숨 돌리게 한 요인이 됐다.
‘부산대첩’은 조선으로 건너와 전쟁을 진두지휘하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한 의지도 꺾었다.
1907년 러·일 해전의 승자인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찌로 제독은 전승 리셉션에서 각국 외신기자들이 그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하면서 칭송하는 덕담을 하자, 자기를 넬슨 제독과 비교하는 것은 이해하나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하면서 자기는 이순신 장군의 발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거 강점기 시절, 진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이 연중행사로 충렬사를 참배한 사실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한 이후에도 해군이 이순신에 대해 외경(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함)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참배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대 차원에서 용인, 권장했음을 말해 준다.
1882년 세키 고세이가 ‘조선 이순신’을 출간한 이래 일제강점기(1910-1945)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에 관한 글을 쓴 일본의 학자, 군사전문가, 저술가는 대체로 이순신을 뛰어난 전술전략, 통솔력, 발명, 창조의 능력, 충성과 용기에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조선의 구국 영웅” “세계적인 바다의 명장” 등으로 높이 평가한다.
조선의 군함은 큰 것부터 말하면 판옥선, 협선, 포작선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외에 이순신이 새로 창작한 것이라고 하는 귀갑선(거북선)이 있었다. 조선 육군이 연패한 것에 비해 조선의 수군이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은 것은 첫째로 조선의 선체 건조기술이 일본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일본 교과서에 등장한 이순신에 대한 일본의 평가와 인식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우선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각급 교과서, 참고서 등에도 실렸다는 점이다.
이순신을 숭상하는 것은 장군의 자기 희생정신, 끝없는 충성심, 애국애민정신 그리고 거북선을 만든 창의력과 선공후사의 정신은 물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랏일에 이바지하면서도 군소배가 자기를 모함하거나 말거나 일에 승산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의 의무라고 믿는 바를 위하여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아니하고, 변치 아니한 그 인격이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충성심, 애국애민정신, 희생정신, 창의력, 도량과 배려는 물론 철저한 선공후사의 자세를 오늘날에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재난을 겪고 있다. 우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전투에 임한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임전무퇴 굳센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장군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해양수도 부산을 기점으로 망망대해로 우리 영토를 넓히고, 바다 속 부를 창출해 동북아 물류 중심 항이 되고, 부산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 고문
*기사원문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00929.22021007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