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첩 기념시설, 북항에 세우자" 2017.9.25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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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0-23 09:37 작성일 조회1,68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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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제1회 부산대첩기념식
- ‘10월 5일’은 부산시민의 날
- 이순신·정운 장군 등 활약
- 후세가 기억하고 배우도록 해야
이순신 함대가 1592년 음력 9월에 올린 ‘부산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釜山破倭兵狀)’를 보자.
1994년 10월 열린 부산포축제 때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동래학춤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바다에서 모형 거북선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국제신문 DB
“삼가 적을 불태워 죽인 일로 아뢰나이다.…그동안 전후로 4차례 출전하여 10번 맞붙어 싸워서 전부 승리하였으나, 장수와 군사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서로 싸울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큰 적의 소굴에 줄지어 정박해 있는 470여 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한껏 벌려 승리한 기세를 타고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겁을 내고 꺾이는 일 없이 하루 내내 마구 공격하여 적선을 100여 척이나 때려 부수어 적들로 하여금 기가 꺾이고 간이 떨어지게 만드니 적들은 머리를 웅크리고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출처는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1권 418쪽)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자. “부산의 큰 싸움에서도 몸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잊어버리고 앞장서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 하루 내내 싸웠는데, 힘껏 쏘아댔기에 적들은 꼼짝도 못 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돌릴 무렵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애통한 일입니다.”(‘정운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장계’ 중)
이순신 장군이 “그간 신이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라고는 다만 정운 등 두세 사람뿐이었습니다”라고 했을 만큼 아꼈던 정운 장군은 부산포해전이 거의 끝난 시점이 되어 배를 돌리면서 ‘함대가 이동할 때’ 그만 이마에 철환을 맞고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은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애통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어찌 정운 장군뿐이겠는가. 부산포해전 자체가 그러하다.
이렇듯 후세인 우리가 꼭 기억하고, 의미를 발굴하고, 함께 기념해야 할 부산포해전의 승전기념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5일이 바로 ‘부산 시민의 날’이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는 그런 의미를 더 많은 부산 시민에게 알리고 함께 기념하고자 제1회 부산대첩기념식을 27일 오후 4시 부산 중구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5층 컨벤션센터 컨퍼런스홀에서 연다. ‘이순신 전도사’ ‘이순신 장군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느라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통하는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기념사업회를 주도한다.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가 출연하는 바다음악회, 승전 425주년 기념식, 소설가 김진명 특강으로 행사는 진행된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는 이번 기념식을 시작으로 부산 북항에 ‘부산대첩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순신 장군이 장계에서 직접 표현한 대로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애통한 일”이다. 북항 근처 바다가 바로 부산포해전의 현장인 만큼, 북항은 부산포해전기념시설을 세울 최적의 장소다. 이순신 장군의 삶과 정신과 헌신이 한국 나아가 세계에 주는 감동과 가르침이 뚜렷하고 보편적이니, 세계로 열린 창구인 북항의 이미지와도 맞다. 부산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 함께 나설 사안이다. 다만, 교류와 평등한 사귐의 좋은 역사를 간직한 조선통신사 등의 기념시설이 어우러지는 등의 방식으로 ‘관문’으로서 북항의 성격을 살릴 필요는 있을 것이다.
기사원문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926.22023010403